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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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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정나루터
    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소개단밀면 낙정리의 낙동강 나루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큰 나루터였다.예나 지금이나 낙동강 물은 여기에서 바다처럼 넓고 깊게 모여 큰 물굽이가 되어 돌다가 서서히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군 위, 의성의 물을 모아 흐르는 위천도 여기 에서 상류 5리 지점인 구천에서 합류가 된다. 강 건너편은 상주시 낙동면이고 구미시도 이웃하여, 서로가 건너다보는 곳에서 세고을 이 손을 맞잡은 듯 가깝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역사에는 수많은 처참한 전쟁이 있었는가 하면 남북 내왕 의 길목으로 행인이 줄을 이었다. 관원의 행차가 수없이 오르내리 고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서울을 찾아가던 과거길 선비도 수없이 많았다. 이 유서 깊은 나루는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나루 중의 하나가 되었다.1986년에는 낙단교가 개통되었고, 1990년에 관수루도 복원되었다. 이제 주말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형형색 색의 차림으로 계속 찾아드는 낙정 유원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의성군에서 위락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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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미 3.1 독립 만세 운동 기념탑
    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소개기미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도내에서는 의성군 비안면 공립 보통 학교(현 이두초등학교 비안분교)에서 학생들이 3월 11일거사를 모의 했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고 다음날(3월 12일) 등교와 동시에 만세을 부른 것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된 것이었다. 일인 학교장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50여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 하였으며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주민들과 합류되어 가두시위와 만세 운동을 쌍계 마을에서도 부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미년 3·1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62년 3월 1일면 구 청사에 면민들의 정성을 모아 화강석주를 높게 세우고 선열 19위을 새겼으며 그해 쌍계 초등 교정에 3·1 독립 투사비를 세워 당시 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려 해마다 행사를 추진해 오다가 정부의 행정 간소화로 지역 행사를 생략하게 되었다. `98년 면장으로 부임한 김 해진씨의 제안으로 2000년 3.1 독립 만세운동도 시발지 재현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경북도 행사를 유치하여 이의근 도지사님, 정창화 국회의원님, 류인희 도의회 의장님, 도승회 교육감님, 전용찬 경북 경찰청장님등 도 단위 기관 단체장님을 모시고 추모 기념식과 재현 행사 기념비 기공식 가두시위등 각종 행사를 성대히 가져 올 곧은 선대들의 호국 보훈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향토 출신 국회 행정 자치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신 박 봉국씨의 도움으로 5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군의회 운영위원장 한 경균씨가 추진 위원장을 맡아 2001년 3월 1일부터 익년 2월 28일 준공을 목표로 엔 . 에스 디자인 환경 조형 연구소 오용환 교수님의 창안으로 당시 독립 만세를 불렀던 목단봉에 기념탑 건립과 공원 조성을 위해 현재 추진중에 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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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성
    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소개조문국시에 부족 소국과의 싸움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길이 약 4km, 높이 4m, 폭 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년)에 축성함정보내용
    오경우   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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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해와(蹈海窩)
    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소개능성구씨도해공파가음종중의 소유로 具譓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工夫를 뜻하는 工字형의 건물로 매우 지붕의 선이 매우아름답다.정보내용
    오경우   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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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재(五土齋)
    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오토산(五土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재궁(齋宮)이다. 이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여기에는 진민사 유지비문(鎭民祠 遺址碑文)과 중건사적 비문(重建事蹟 碑文)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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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소미륵불
    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소개용소마을 입구 산기슭에 방 한칸 정도의 동굴이 있어 주변 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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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고정
    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소개박윤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시 아들 협과 손자 태원을 곽재우에게 보내 창의 호국케 하였으며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하게 학문에 전념하였다.송고정은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월록 서당을 개축하여 송고정이라 하였고 1974년에 중수하였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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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각
    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증손자이며 서애 류성룡의 이종질)과 그의 뒤를 따라 순절한 아내 신씨 및 노비 복분(福分)이 충절이 새겨진 비각으로 이조 광해 원년(1609년)에 비각 건립하였으며 1956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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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촌마을 자료관
    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사촌 전통마을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류씨의 집성촌으로 행정 권식(杏亭 權軾 1428 - 1485),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 - 1563)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전통의 선비마을로 대과에 13명 소과에 31명이 합격하는 등 많은 선비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란당시 왜군들이 마을의 와가 대촌을 불살라 버려서 현재는 30여동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조의 전통적인 양반촌으로 유교촌락문화경관이 잘 보전된 역사문화의 자산으로 사촌마을 문집 및 주요저서 75점과 사촌마을 주요문화재 및 전통가옥을 소개한 사촌마을 자료관(96평)을 2006년 3월 신축하여 유교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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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산정사
    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소개만취당 김사원 선생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안동 도산의 천산정사를 1767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김사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지냈으며 崇祖敎孫(숭조교손)의 전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대원군때 서원 훼철령으로 인하여 철회된 것을 1991년 중수하였음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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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선리 산성터
    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소개의성읍 치선1리 뒷산에 위치한 이 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해발고도 230미터에 비해서 비교적 조망이 좋으며,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산정식 토석혼축성(山頂式 土石混築城)이다.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뻗은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평평하게 삭토(削土)한 건물지가 있고, 서북벽의 모서리에는 약간 높은 석대(石台)의 망대(望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북쪽 일부에는 봉수대(烽燧臺)의 유구(遺構)가 있는데 후대에 와서 개축한 듯하다. 성벽은 경사가 급한 서쪽에 높이 1-2미터, 성벽 너비는 1.2미터 정도의 석심토축(石心土築)으로 약간씩 축조하였으며, 그 이외의 북동남벽의 높이는 약 3 - 6미터의 규모로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여 축조했다.성곽을 둘러싼 내부의 회곽로(廻郭路)는 너비가 7-10미터 내외이다. 군데군데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곳에는 약 20미터의 너비로 확장되어 있다. 동벽에는 성문지(城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저경(底經) 1.5미터, 높이 6미터의 상면이 고분모양의 평평한 돌무더기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곳은 가장 높고 사방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미루어 볼 때, 전망대로 추정된다.성내에서는 우물이 발견되지 아니 하였는데 아마 오랜 세월 속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00미터이며 현재 성의 정상부와 내부 회곽로(廻郭路)에는 민묘가 수십기 조성되어 있어, 성의 유구(遺構)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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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소루
    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소개건축연대 미상이나 고려 중엽의 건물로서 문소루(聞韶樓)를 포함하여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 교남은 지금의 영남)로 칭하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중에서도 그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이 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강산이 초토화 되었던 임진란에도 별다른 변동 없이 지나 왔는데 조선 효종8년(1657) 정유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숙종20년(1694) 갑술년에 현령 황응일(縣令 黃應一)이 중건하였으나, 6.25동란시 전소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82년 12월에 구봉산 제9봉에 再建 開基祭를 올리고, 1983년 5월 9일 상량을 보게 되고 그해 9월 목조 9간(9間) 마루 면적 약 25평의 준공을 이루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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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민사유지비(鎭民祠遺址碑)
    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소개현재 의성읍 중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김용비(金龍庇)의 공을 기리는 비각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 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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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틀바위
    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소개상세내용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혼자 힘으로 살기가 벅차 어느 부잣집의 시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그 집주인 마님은 마음씨가 고약해 늘 성화를 부리며 고된 일만하게 하여 아무리 참으려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갈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주인 마님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갔으나 그만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 벌로 매일 베 한 필씩 짜야만 했다.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손에 피가 맺히고 다리에 멍이 들도록 일하여도 하루에 베 한필 짜기란 힘들 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불쌍한 처녀라고 동정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처녀는 지성으로 말없이 일하는 길 외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선녀들이 내려와 베 짜는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인근 마을로 퍼져가니 사람들은 선녀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선녀도 그 처녀도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로지 베틀 모양을 한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한다. 이리하여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해서 선암(仙岩)이라 하며 처녀가 베를 짜던 곳이라 하려 베틀바위란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처음엔 베틀 모양 그대로였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풍화작용으로 원래의 베틀 모양은 많이 변해 지금은 베틀얼개 보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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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혼탑
    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소개충혼탑은 전국 공모로 당선된 작품으로 조각가 신동일, 김동호의 작품으로 주탑과 위패실 좌ㆍ우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의 규모는 기단포함 15m이며 거창석 통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상징은 하나 된 조국을 표현한 작품으로 태극기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 국민들로 하여금 단합과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져 하였다. 좌측 군상은 조국 수호상의 개념으로 군,관,민이 하나 되어 싸워 나라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우측군상은 군민과 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군민 화합 상으로 단합과 군민의 진취적 사고를 형상화한 군상작품이다. 정보내용
    오경우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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